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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을 위한 글/2009.10.7

일제 강점기의 남촌, 식민지 지배층을 위한 특권적 공간


조명래(단국대 교수)


 국운을 다시 일으키려는 심사로 고종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에 앞서 1896년 8월 고종은 서울을 황도로 개조하기 위한 지시도 내렸다. 새로운 본궁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현재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지는 길, 동쪽으로는 을지로에 해당하는 구리개길, 동남쪽으로 현재의 소공로, 남쪽으로는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그렇게 해서 정비되었다. 워싱톤을 본 딴 방사형 가로체계로 서울을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점, 일본은 남산 아랫자락에 구축한 그들의 거점을 서울 중심부를 향해 확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고종의 황도 건설에 맞불을 놓은 격이다. 도시개조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여기에 더해, 새로 연 ‘광화문-남대문 가로축’은 일제가 용산으로부터 서울로 침투하는 경로가 되었다. 서울은 점차 식민도시로 전락해갔다.


 이는 일본인 거주가 급격히 느는 것으로 확인될 수 있었다. 일본인의 성안 거주는 본래 허용되지 않았다. 1880년 서대문 밖 천연정(지금의 서울 적십자병원 자리)의 청수관에 연 공사관에 40여명의 일본인이 기거한 것이 처음이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청수관이 불 타자, 이들은 성안으로 들어와 금위대장 이종승 집을 임시로 쓰다가 교동의 박영호 집을 사들여 공사관으로 신축했다. 이때의 공사 인부 70명은 서울에 들어온 최초의 일본 민간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인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조정을 압박해 서울의 입경과 거주를 정식으로 허가받았다. 이때가 1885년 2월이었다. 일본 공사관도 남산 기슭 ‘녹천정’ 자리로 옮긴 뒤였다. 일본인 거류지역은 공사관 인근 중구 예장동, 주자동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진고개 일대로 지정되었다. 최초의 일본인 가옥 12 동이 명동성당 후문 앞 일대에 세워졌는데, 그 해 9월 일본 거류민은 20호 89명이었다,


 이는 조선인이 모여 사는 북촌과 대비되는 일인 거주지 남촌의 시작이었다. 지금의 예장동 일대인 남촌의 시작점은 300년 전 임진왜란 때 일본군 1500여명이 성을 쌓고 1년간 머물던 ‘왜성대’라는 곳이다.  남촌의 등장은 300여년 만에 일인의 식민지 건설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거류민 수는 빠르게 늘어 1884년 말 260호 848명에서 1895년 말 500호 1,889명으로 배가 되었다.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거류지역을 본격 확장시켰다. 진고개에서 남대문 사이에 새 도로를 냈다. 일본인 전용 종합병원을 신설하여 무료 진료도 실시했다. 일본 상품 전문 진열소까지 설치했다. 19세기말 일본과 조선을 오갔던 영국인 여류 여행가 비솝(Bishop)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에서 당시 일본인 거주지역을 아래와 같이 그리고 있다.


 “남산 비탈에 단조하고 순수한 백색 목조의 일본 공사관 건물이 위치하고, 그 앞쪽엔 근 5천명이 살고 있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다. 다방도 있고 극장도 있으며, 그 밖에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 곳은 조선인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점포와 주택이 들어선 가로가 깨끗하고 깔끔하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인들이 허리띠를 두른 기다란 일본 옷을 입고 남자들은 모두 나막신을 신은 채 일본에서와 같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 군인들과 헌병, 그리고 칼을 찬 경찰 등이 시간을 맞추어 거류지 내의 호위병을 교대시키고 있다”.


 일본인 거류지가 커지고 관리업무가 늘자 일본 공사관은 1896년 주자동 6번에서 충무로 1가 입구(현재 신세계 백화점 자리)로 확장해 옮겨갔다. 고종이 도시개조를 지시했던 해였다. 현재의 남대문로와 연접한 곳으로 공사관의 이전은 일인 거류지의 중심지가 외진 남산 밑에서 번잡한 도심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거류지 개념에서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 개념으로 남촌의 확장을 말한다. 이전 후 후 10여 년 간 일본인 수는 약 5배가 늘어 1906년에 만 명을 넘어섰다. 한일합병이 되던 1910년 일본인은 서울 인구의 14%를 차지했는데 대부분이 남촌에 살고 있었다.


 일본 공사관의 지위도 변했다.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1905년에 통감부를 설치했고, 이듬해 공사관을 통감부의 경성지부인 ‘경성이사청’으로 바꾸었다. 이 변경은 외교기관에서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변화를 의미하고, 또한 이방인의 거주지에서 식민지 지배층이 사는 특권적 공간으로 남촌의 변화를 의미한다.


 도심으로 공사관이 옮겨간 이래 남촌의 변화는 외연의 확장과 내부정비로 나타났다. 우선 남촌의 남측에서는 남산의 성역화와 식민지 통치의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1897년 왜성터 일대 3천 평에 ‘왜성대 공원’을 조성했고, 이듬해엔 지금의 숭의학원 자리에 대신궁이라는 신사(1923년 경성신사로 바뀜)를 세웠다. 1906년 예장동 주변을 경성공원으로 조성했고, 2년 뒤엔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회현동에 한양공원을 조성했다. 이곳은 후(1918-1925년)에 황민통치의 상징인 조선신궁의 건립 터가 되었다. 한편 식민지 통치권력의 기반으로 통감부가 1908년 현 서울 에니메이션센터 자리에, 일본군사령부(한국주차군사령부)가 1908년 남산의 서남쪽(필동에서 용산으로 이전)에, 헌병대사령부가 현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옛,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에 각각 들어섰다. 남산의 동측으로 장충단(임오군란과 을미년 사건 때 죽은 관리와 군인의 제사를 지내던 곳)을 폐사하고 1919년 장충단 공원으로 조성했다.


 남촌의 도심 쪽 정비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는 1910년 남대문에서 남대문 정거장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했고, 1911년에 황금정 (현 을지로), 1912년에 태평통(태평로)을 준공했다. 황금정은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을 청계천변까지 확장시키면서 본전통(충무로)과 함께 새로운 중심가로 부상했다. 총독부는 한 걸음 더나가 경성 도시개조도 추진했다. 북촌과 남촌의 중심을 안국동과 을지로 3가에 두고, 각 중심의 방사형 도로망을 개설한 뒤, 남촌과 북촌을 파고다 공원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도시구조의 개편이 시도되었다. 1908년엔 일본 황태자 방문을 맞이하여 남대문을 허문 뒤,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남북축도 구축했다. 이로써 남촌이 서울 밖으로까지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남촌 내부의 중심부는 충무로에서 명동(조선시대 명례방)으로 넓혀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충무로 1-3가의 진고개를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본정, 즉 혼마치로 부르며 중심가로 키워갔다. 충무로 1, 2가에는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귀금속․잡화류․화장품․서적․문구류․ 식료품․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고급 점포들이 즐비했다. 1910년대에 들어 충무로 상권은 인근의 명동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해서 1912년엔 명동2가 85번지에 경성어시장이, 1919년엔 25번지에 공설시장이 문을 열었다. 지명도 일제식 동명인 메이지마치(명치정)으로 바뀌었다. 혼마치와 메이지마치는 남촌을 상징하는 최고의 번화가였다.


 이곳은 단순한 고급의 소비지만 아니었다. 일본 공사관이 남대문통으로 옮겨오고, 또한 경성이사청으로 승격되는 것을 전후로 충무로․명동 일대엔 조선을 경제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기관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가령, 한반도 경제침략 3대 본거지인 조선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이 바로 이 무렵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은행은 1907-1912년 사이 남대문로의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고, 동양척식회사는 1908년 현재 을지로 2가 외환은행 자리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현 롯데호텔 신관인 남대문로 2가에 세워졌다.


 이후 남대문로는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을 포함해 동일은행, 천일은행, 조선상업은행, 조선신탁회사, 삼화은행, 삼화은행등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최고 금융거리가 되었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금융기관과 관련된 대기업체와 백화점이 대거 입지했다. 오늘날의 증권거래소 전신인 경성주식현물취급시장이 1920년 명동에 개설되었고, 현 한국전력의 전신인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남대문로 2가에 1927넌 준공되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이 된 삼정(미츠이) 재벌 계열의 삼월(미스코씨) 백화점이 1927-1934년 충무로 1가 현 위치에 건립되었고, 삼중백화점도 1932-33년에 충무로 2가 24번지에 문을 열었다. 1939년엔 미도파 백화점의 전신인 전가옥(조지아) 백화점이 들어왔다. 일제시대의 3대 임대빌딩 중 하나인 천대전 빌딩도 1932년 남대문로에 건립되었다.


 남대문로가 금융경제와 대중소비의 요람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아울러 인근의 소공로와 명동 일대도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소공로에는 조선호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공회당, 사우공회의소, 은행집회소, 비전옥여관, 일본항공수송회사 객화취급소, 경성부 도서관, 기독교청년회 등이 들어섰다. 명동 일대에도 전가옥 백화점이 선 뒤 건너편 명동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의 도로가 10m 폭으로 확장되면서 독립적인 상가가 형성됐다. 당시 명동은 충무로에 예속된 유흥오락가로 다방, 카페, 주점 등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충무로 중심의 남촌은 명동과 남대문로 중심으로 점차 탈바꿈해 갔다. 도심 집중이 가속화되자 일제는 예장동 통감부 자리에 있던 총독부를 1926년 경복궁 앞으로 신축해 옮겼고, 경성 이사청에서 승격한(1918년) 경성부청(시청)도 1926년 현재의 위치(당시 경성신문사 터)로 신축해 옮겼다. 부청 자리엔 삼월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조선은행 앞 광장(일인들은 줄여 ‘선은광장’, 즉 센기마에고조라 불렀음)을 중심으로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삼월백화점이 삼각축을 이루는 남대문통 랜드마크가 생겨났다.


 1920년대 남대문통 시대가 열리면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엇비슷하던 북촌과 남촌의 경재력은 현격한 격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인 상인들은 식민지 지배자로서 지위를 이용해 급속히 성장했고, 이는 도시공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성부 내 주요 공공건물 중 북촌에 위치한 것은 조선총독부 하나에 불과했고, 그 밖의 건축물 대부분은 남촌에 있었다. 남촌은 충무로 일대(진고개 본정 1-5정목), 명동에서 인현동까지(명치정, 영락정, 약초정, 일지충정, 수정, 앵정정), 퇴계로 남쪽 즉, 남산동, 회현동, 예장동, 필동, 묵적동 일대(남산정, 욱정, 왜성대정, 대화정, 신정)에 걸쳐 있었다. 이들 지역의 주민 중 일본인 비율은 평균 90%에 달했다.


 1930년대 중반을 접어들면서 남촌 중심부인 충무로와 명동은 마치 일본을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일본을 거쳐 온 서양의 신문화가 조선에 등장하는 무대가 이곳이었다. 여기서도 특히 백화점이 꽃이었다. 삼월 백화점 중심으로 밀집된 고급 상가들이 불야성을 이루는 충무로, 즉 혼마치는 경성 사람이면 누구나 가서 맘껏 소비하고 즐기고 싶어 한 욕망의 해방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내지인으로 불린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층으로 삶의 기회를 특권적으로 누리는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충무로․명동 일대의 백화점 등을 배회하며 옮겨 다니는 무리를 ‘혼부라당’이라 불렀다. ‘혼마치를 방황하는 무리’란 뜻의 일본어 속어다. 모던 보이이나 모던 걸의 겉모습을 한 이들은 제국주의를 통해 번진 자본주의적 소비욕망의 포로였지만, 동시에 탈권력화된 식민지 국민이기도 했다. 북촌에서 강(청계천)을 건너 혼마치로 몰려간 이들은 백화점을 배회하면서 고히(커피)와 칼피스를 마시고 재즈를 듣고 찰스턴을 추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북촌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꿈같은 남촌의 화려함을 뒤로 한 채 돌아온 북촌은 더욱 깜깜하고 궁핍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1930년 말, 1940년대 초 서울의 도심 모습은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태평양전쟁 발발로 용산과 영등포가 도시변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점이다. 1930년대부터 나타난 ‘대경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서울은 ‘대동아 공영권’의 거점도시로의 공간적 확장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남산 북쪽에 구축된 남촌과 남쪽에 조성된 신시가지가 연접되는 ‘대경성’의 한 현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전쟁 폐색이 드리워지면서 남촌의 화려함은 빛을 잃기 시작했으니 대경성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끝>

  

* 해방촌 역사: 조명래(단국대 교수)


 해방촌은 글자그대로 8.15해방 후 생긴 마을이다. 해방촌의 법정명칭은 서울용산구2가이고, 행정동으로는 용산2가동에 속한다. 용산2가동에는 용산2가와 더불어 용산4가까지 포함되어 있다. 기슭을 내려온 평지에 조성된 미군기지가 있는 곳은 용산 4가다.


 조선시대 이곳은 성저십리에 속해 한성부가 관할한 지역으로 인가가 드문 솔밭이었다. 갑오경장 때까지만 해도 왕실과 문묘의 제사에 쓸 황소, 양, 돼지를 키우던 전생서(전생서)가 있었다. 일제는 남산의 북쪽과 서쪽 사면 기슭을 따라 각종 신사와 권력기관들을 배치시켰지만 능선 너머의 남쪽 기슭은 크게 손대지 않았다. 조선궁과 가까워서인지 일본 신사가 몇 개 있었을 뿐이었다.


 해방직후까지만 해도 이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림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 해방 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월남인들이 자리잡게 되면서 생겨난 마을이 곧 해방촌이다. 월남인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46년경이다. 1945년부터 월남한 사람들은 당시 비어 있던 일본의 육군관사(한 때 육군형무로소)를 집단적으로 점거해 살기 시작했다. 이 관사들은 필동 2가에 있던 일본주둔군사령부가 1908년 용산에 새로 건립된 청사로 옮겨오면서 현재의 용산고 남쪽으로 길을 따라 대규모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사람들이 무단으로 육군관사에 들어와 살게 되자 퇴거명령을 내렸다. 이를 받아드리지 않자 미군정은 건물을 뜯어가도 좋으니 관사 터는 비워줄 것을 다시 요구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자 1946년 미군은 이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이렇게 해서 쫓겨난 사람들은 현재의 해방촌 중 윗동네(이태원 쪽, 초기의 용산동)에 터전을 잡았다. 해방촌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약간 아래쪽에(후암동 쪽, 초기의 신흥동) 또 하나의 거주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착자들은 대부분 평북 선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선천은 기독교 선교가 일찍이 시작된 덕택에 기독교인이 많고, 또한 광산이나 해상무역 등으로 자산가들이 많았던 지역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선천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주의 통치에 자연스럽게 반발했고, 또한 이를 피해 남쪽으로 대거 내려왔다. 내려온 사람들 중 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교회 맞은편에 천막을 치고 살기 시작했다. 사람이 점차 많아지자 이들은 1947년 사회부장관과 교섭하여 임시 천막 40여개를 얻어 지금의 해방촌 자리에 정착하였다. 이때 정착한 사람들은 약 400여 가구에 달했다. 이들이 자리 잡은 곳은 바로 일본신사가 있었던 자리였다. <끝>


Posted by 열린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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