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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7 10:33

지속가능한 발전의 오해 2005년2010.07.07 10:33


2005년 4월6일자 중앙시평에 실린 박용성씨의 글은 한국의 환경운동에 관한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가지만 논자의 편향된 생각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한 이해부족이란 감도 지울 수 없다.

 

우선,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과 연혁을 소개하면서, ‘경제성장을 상위개념으로 친다’로 맺은 대목은 우리를 참으로 당황스럽게 한다. 1972년 로마클럽보고서에 의해 촉발된 경제와 환경에 관한 논의는 경제중심의 발전방식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환경과 경제의 균형을 실현하자는 데로 모아졌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이로부터 도출된 개념이다. 그런데 ‘경제성장을 상위개념’으로 하는 지속가능한 발전관은 이런 논의를 뒤엎는 것이다. 이는 논자가 취하고 있는 경제지상주의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는 듯싶다.

 

환경문제는 ‘외부 불경제’라 해서 시장에서 개인이나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정부가 정책으로 개입해도 경제를 과신하는 현실에서 환경훼손은 날로 더해간다. 경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실로 경제지상주의 그 자체로서 사회전반에 막강한 힘을 행사 하고 있다. 경제지상주의가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가로막는 주범임은 식자라면 대개 수긍하는 바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이면 소득 몇 만불이란 것으로 한 사회의 발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득수준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상태를 자동적으로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혹 소득지표가 발전수준을 가리킨다면, 만불의 우리 현실에서 환경주의자들이 소득 3만불의 선진국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한다. 훼손되면 돌이키기 힘들다는 ‘환경의 불가역성’ 주장을 따르면 소득 3만불을 전제하는 환경은 지금부터 가꾸어야 한다.

 

1992년 리우회의가 지속가능발전 원칙을 채택하면서 주요 당사자들간의 논의와 합의를 통한 실천방식을 주문했다. 새만금방조제공사나 천성산터널공사가 지속가능성의 원칙과 방법에 의거해 결정․추진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환경단체들의 문제제기는 지속가능하지 못한 정책을 지속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요구이고 이를 통해 미래에 발생할 경제적, 환경적 비용을 최소화하가 위한 요구다. 사업지연에 따른 손실비용은 잘못 수립된 정책의 비용으로 시민들이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해야 할 몫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한국의 에너지 효율성은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낮고 일본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는 한국의 산업경쟁력을 낮추고 국토환경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부하량을 거는 까닭이 된다. 기후변화협약의 발효로 재생가능에너지 의무사용비율이 현실화되는 지금, 이러한 에너지소비구조로는 세계 최고의 환경불량국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대체에너지에 대한 진정한 고민은 경제성이 없는 것을 기술․제도․정책의 혁신을 통해 경제성이 있도록 하는 데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소득 만불에서 2만불로 나가기 위해 도로, 항만, 주택 등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토의 막개발’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우리의 건설산업은 실로 막강하다. 국민경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건설부문은 그 자체로서 거대한 개발세력이 되어 국토환경을 끝임 없이 파헤쳐 나라 전체를 토건국가(土建國家)적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수요에 따른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수요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예측․계획하고 친환경적으로 실현해내느냐이다.

 

요컨대 한국사회가 지속가능하지 못한 까닭은 경제지상주의가 다른 가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데 있다. 환경지상주의는 경제지상주의로 기울어진 추를 환경으로 조금이라도 옮겨놓기 위한 표현으로 읽혀져야 한다. 삶의 터전인 환경이 사회발전에 녹아들 때 지속가능한 발전이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앞선 나라들이 갖추고 있으면서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발전방식의 요소다. 박용성씨의 글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2005-04-19

Posted by 열린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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