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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7 10:41

카트리나 재앙의 이면 2005년2010.07.07 10:41


카트리나 재앙의 이면  - 사회정의 넘어 환경정의를

 

누가 자연을 엄마의 품과 같다고 말했던가? 오늘날 자연은 오만가지 궂은일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자연의 재앙이란 혹독한 벌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재앙은 무차별적인 것 같지만 기실 약자에게 더 큰 시련을 주고 있으니, 왜일까? 이는 인간사회의 불평등 역학구조를 따라 재앙이 강자와 약자에게 차별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약자는 사회적으로 겪는 불평등에 더해 자연을 매개로한 불평등을 함께 겪고 있다. 불평등은 사회의 영역을 넘어 자연의 영역으로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그래서 정의(正義)의 문제는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서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로 확장되어야 한다.

불평등 구조 산물

최근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흑인 빈곤층에게 보다 많은 피해를 남긴 현상에서 우리는 정의의 문제를 환경의 관점으로 재성찰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카트리나 재난은 흑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허리케인이 우연히 들이닥친 결과가 아니라 미국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매개로 해 흑인 빈곤층에게 피해가 더 집중된 결과이다.

피해를 겪은 동남부지역은 유색인종의 집중도가 높고 소득과 자동차 소유가 전국 평균 절반에도 못 미치는 곳이지만, 뉴올리언스 빈민촌은 더욱 그러하여, 주민 대부분이 흑인이고 4분의 3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며 자동차를 가진 가구가 3가구 중 1가구에 불과하다. 전국 살인발생률의 10배에 이를 정도로 사회환경이 위험스러운 것은 미국사회에 뿌리 내린 인종차별주의의 공간적 결과인 셈이다.

 

로이터연합기자 천재 그리고 인재.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 몇 개 주를 할퀴고 지나갔다.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장 큰 재해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가고 난 직후 뉴올리언스에서 발생했다. 주변의 강둑이 무너지며 도시 전체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망자 수와 피해정도는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회환경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빈곤지역이 처한 자연환경이다. 1718년 프랑스 귀족 장 바티스트 르 모인이 엔지니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건설할 당시부터 뉴올리언스는 해수면 아래에 있었고, 그 후 해안선 일대의 습지를 마구잡이로 개발한 결과, 바닷물의 공격에 상시적으로 노출된 자연환경 속에 흑인빈곤지대가 놓이게 되었다. 거기에 세계 온실가스 30% 배출을 허용하는 미국의 환경정책에 의해 3배나 강화된 허리케인이 빈곤층의 생명을 더욱 위험한 상태로 내 몰았다.

이러한 상황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매달 56억 달러를 전비로 사용하는 부시정부는 2005년 미 육군이 뉴올리언스 제방보수비로 요청한 2천7백만 달러를 390만 달러로, 홍수예방사업을 위해 연방정부에 요청한 7천8백만 달러를 3천만 달러로 대폭 삭감했다. 뉴올리언스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은 이라크 전쟁예산을 충당하느라 멕시코만 일대의 허리케인 대비가 소홀해 큰 피해가 발생할 것이란 기사를 여러 차례 냈지만 부시정부는 이를 시종일관 무시했다.

흑인을 차별하고, 빈곤을 방치하며, 해안 생태계를 파괴하고,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국민의 안전을 위한 재정지출을 줄이는 등의 미국사회의 부도덕함이 카트리나 재앙을 키웠던 것이다. 이를 두고 어느 논자는 ‘미국 사회구조가 재난을 재앙으로 바꿔놓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연의 재앙에 대해 흑인 빈곤층이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것은 미국에 그 만큼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카트리나 재앙은 ‘환경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상태로 미국사회가 변모해 가는 가운데 발발한 인재다.

미국에서 환경정의는 클린턴정부 때부터 환경정책의 주요 대상으로 다루어 왔다. 미국 환경청 내에는 환경정의를 담당하는 부서가 별도로 있고, 대통령 칙령으로 환경정책에서 환경정의를 중요하게 다룰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정부는 시민권 개념으로 규정하던 환경정의의 문제를 환경피해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입장을 도입했고, 그 결과 환경정의를 지향하는 미국 환경정책 전반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환경부정의’가 부른 인재

미국에서 환경정의의 문제는 ‘환경적 인종차별주의(environmental racism)’를 뜻하지만, 부시정부의 환경정책은 ‘인종과 소득에 관한 중립적 원칙’을 반영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저소득 흑인들이 유해한 환경에 더 많이 노출되고, 그로부터 더 많은 환경피해를 겪는 현실에서 ‘인종과 소득에 관한 중립적 원칙’은 ‘환경 부정의(不正義)’가 더욱 만연해질 것임을 기정 사실화한다. 카트리나 재앙은 부시정부 하에서 확산되고 있는 ‘환경 부정의’의 한 현상이다. 환경재앙이 인류 문명전반을 위협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환경정의를 중심으로 인류공동체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지만, 미국을 포함한 오늘날 지구촌 사회는 이러한 길을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하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ㆍ환경정의집행위원장

위 글은 시민의신문 개재된 글입니다.

Posted by 열린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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